피카소 그림 조각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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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피카소
파블로 피카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파블로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 태생이며 프랑스에서 활동한 입체주의 화가이다.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미술교사였다. 초기 청색 시대를 거쳐 입체주의 미술양식을 창조하였고 20세기 최고의 거장이 되었다. 

 

 

피카소 - 현대미술의 제왕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어머니는  '네가 군인이 된다면 분명히 장군이 될 것이다. 네가 성직자가 된다면 반드시 교황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블로 피카소는 그의 부인 프랑수아즈 질로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대신 나는 화가의 길을 선택했으며 마침내 피카소가 되었다"라고 했다.

 

반세기 동안, 피카소는 미술의 개혁을 이루어내고,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낸 후 그것이 정통적인 것으로 확고히 자리잡기도 전에 다른 스타일로 옮겨감으로써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공로는 20세기 미술계에 중요한 혁신이었던 입체주의를 창안해내었다는 것이다. 아흔한 살의 나이에도 피카소는 여전히 생기가 넘치고 다재다능한 화가였다. 서구 미술계에서 가장 다작하는 작가였던 피카소는 5만 점이 넘는 작품을 생산했다.

 

피카소는 말도 하기 전에 이미 그림을 그렸던 신동이었다. 두 살 때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은 그림 그릴 도구를 달라고 "연필, 연필"하며 조르는 것이었다. 스페인에서 평범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십대 전반에 이미 사진처럼 정확하게 사생할 수 있었다. (사생: 실물이나 경치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 1946년, 아동 미술 전람회에 들른 피카소는 "그 나이에 나는 라파엘로 같이 그릴 수 있었지만 아이들 같이 그리는 법을 배우는 데 수년이 걸렸다"고 회상했다. 

 

피카소는 수많은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미술은 언제나 자전적인 것이었다. (자전적: 자서전의 성질을 띠고 있는 것) 그는 "그림이란 내 일기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파리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을 둘러보는 것은 그의 애정 생활을 읽는 것과 같다. 그에게 영감을 주는 주요한 원천은 바로 여성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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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시대

피카소가 보여준 최초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가난하고 궁핍했던 시절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1901~1904년까지 계속된 청색 시대(Blue Period)란 명칭은 피카소가 차가운 인디고와 코발트 블루를 즐겨 사용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인디고와 코발트 블루 : 파란색의 일종으로 파란색 계열의 색 이름을 말한다.) 맹인 거지와 방랑자만을 그렸던 이 시기의 그림들은 연료가 없어서 자신의 그림을 태워 몸을 녹여야 했던 피카소를 사로잡고 있던 우울한(blue) 감정을 투영한 것이었다.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했던 피카소의 이 당시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지가 비정상적으로 긴 창백한 인물들은 마치 엘 그레코(화가)의 굶주린 인물들 같아 보인다.

 

피카소-바닷가의가난한사람들
피카소 <바닷가의 가난한 사람들> 1903년, 워싱턴 국립미술관

 피카소의 멜랑콜리한 '청색 시대' 그림들은 희망이 없는 절망 상태를 보여준다. (멜랑콜리: 우울 또는 비관주의에 해당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장밋빛 시대

피카소는 파리에 완전히 정착했고, 곧 첫 번째 애인 페르난드 올리비에를 만남으로써 그의 좌절감은 사라졌다. 이 시기부터 그는 세련된 장밋빛과 갈색톤으로 어릿광대와 곡예사 같은 서커스 광대를 즐겨 그렸다. 1905~1906년 사이에 그려진 장밋빛 시대(Rose Period), 혹은 서커스 시대의 그림들은 감상적이고 로맨틱한 것이었다.

 

 

피카소-곡예사들
피카소 <곡예사들> 1905년 워싱턴 국립미술관

 '장밋빛 시대'의 특징으로 주제와 색채가 보다 환해졌다.

 

 

니그로 시대

1907년, 피카소는 추상적인 아프리카 가면의 힘찬 표현을 발견했으며 그 모티프를 자신의 그림에 조합시켰다. 같은 해 그는 획기적인 작품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독자적으로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몇 안 되는 걸작의 하나이다.

 

피카소-아비뇽의여인들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 1907년, 뉴욕 근대미술관

 왼쪽의 세 여인에게서는 세잔의 <대 수욕도>의 경향이 다소 보인다. 그러나 오른쪽의 두 여인과 정물에서는 입체주의의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머리는 아프리카 가면 형태로 그려져 있으며, 몸은 단순화된 평면으로 분할되어 역시 면들로 조합된 배경과 결합되어 있다. 

 

 

입체주의의 전조 : <아비뇽의 여인들>

최초의 진정한 20세기 미술작품이라 불리우는 <아비뇽의 여인들>은 거의 500여 년을 내려오는 서구 미술의 르네상스적 전통을 마감한 문제작이다. 조토와 마사초 이후로 가장 급진적인 혁신을 보여준 이 작품은 미술에 대한 고정 관념들을 산산히 부수었다. (조토와 마사초: 화가) 다섯 명의 나부를 보면 눈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거나 귀가 변형되어 있거나 사지가 제자리에 있지 않아서 해부학적으로 엉망이다. 또한 원근법도 파괴해 차츰차츰 뒤로 후퇴하는 대신 공간을 들쑥날쑥한 면들로 분할했다. 심지어 한 인물의 눈은 정면을 바라보는데 그 얼굴은 측면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다.

 

이를 보고 "부서진 유리의 파편 같다"고 평했다. 이 여인들의 극도로 추한 모습은 그의 화실을 방문해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마티스는 장난으로 그린 것으로 생각했고 브라크는 "불을 뿜으려고 등유를 마신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피카소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은 "모든 걸작들이 이 세상에 선보일 때는 이와 같이 추한 모습을 하고 있기 마련이다. 이 추한 모습은 화가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투쟁한 흔적이다"라고 옹호했다. 피카소는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고 알고 있는 것을 그린다"고 말했다. 세잔의 기하학적인 패턴에 영향을 받아 피카소는 사물의 진실된 외형을 다시점으로 분해해서 앞, 뒤, 전방, 후방에서 동시에 분석하고 있다.

 

 

조각 작품

피카소는 회화 못지않게 조각에서도 파란을 일으켰다. 1912년 제작된 <기타>는 얇은 금속판을 조립해 만든 것으로 대리석이나 점토를 써써 조각이나 소조를 하는 전통적인 기법을 깨고 있다. 기존의 오브제(물건)를 사용한 최초의 조각가였던 피카소는 기상천외한 소재를 썼는데 예를 들어 <황소의 머리>라는 조각품은 자전거 의자와 핸들로 만든 것이다.

 

피카소 <기타> 1912년, 뉴욕 근대미술관

▲ 오브제가 캔버스에 사용된 것은 콜라주 최초의 방식으로 입체주의가 현대미술에 기여한 위대한 특징이다.

 

 

 

다양한 스타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피카소는 극도로 다양한 스타일을 실험했는데 어떤 날은 실물 같이 정교하게 사생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또 거칠게 왜곡되고 변형된 인물들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다방면에 관심사와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작품들을 초기, 중기, 말기로 다루기가 무척 어렵다.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개발하는 데 지칠 줄 모르는 개척가였던 피카소의 정력은 "나는 무언가 발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 자신의 말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친구 거트루드 스타인은 말했다. "수많은 화가들 중 피카소만이 보는 바대로만 사물을 표현하지 않고 자신이 본 진실을 그리기 위해 골몰한 유일한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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